고내리 노인회에서 만난 다섯 명의 삼춘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품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열세 살에 배를 타고 제주로 돌아왔고, 누군가는 소를 몰고 돌무덤 사이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다락’으로 향했습니다. 누군가는 바닷가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만화책을 읽었고, 누군가는 열두 살부터 어머니를 따라 바다에 들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이른 아침 경로당 문을 열며 오늘도 어르신들이 편히 쉬다 가기를 바랍니다.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고내리는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삶이 쌓여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춘자 삼춘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해방 뒤 열세 살에 처음 제주 땅을 밟았습니다. 일본에서 주산 학원에 다니던 아이에게 고내의 밭과 들은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더 배우고 싶었지만, 그 시절 시골에서 여자아이가 중학교에 가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자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못 배우니까 자식들만큼은 배워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여섯 남매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100원을 벌면 100원이 다 내 몫이 아니다. 20원은 남에게 환원해야 한다.”
나누며 사는 법은 서춘자 삼춘이 부모에게 배우고, 다시 자식에게 전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문길남 삼춘에게 고내의 어린 시절은 고내봉과 바다, 다락과 개금으로 남아 있습니다. 소를 몰고 나가 친구들과 놀고, 더운 날이면 용천수가 흐르는 곳에서 몸을 식혔습니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놀 거리를 찾아냈습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서울까지 갔지만,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밭을 일구며 살아온 그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배움을 자식들에게 이어주었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묻자 문길남 삼춘은 짧게 답했습니다.
“부지런해야죠. 항상 부지런하면 행복할 수 있어.”
이동원 삼춘은 고내의 이야기꾼 같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는 바닷가였습니다. 만화책을 빌려 바다에 앉아 읽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파도 옆에서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넘기던 소년은 훗날 이발사가 되었습니다.
고내로 돌아와 이발소를 운영했고, 청년회장과 이장도 맡았습니다. 마을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청년들이 함께 상여를 메던 시절도 기억합니다. 태어나고 늙고 떠나는 일까지 마을이 함께하던 때였습니다.
지금 그의 집 앞 팽나무 아래는 사람들이 모이는 제2의 노인정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떠나고 하니까, 친구 아닌 사람하고도 친구가 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김영순 삼춘의 삶은 바다와 함께했습니다. 열두 살부터 상군 해녀였던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시작했습니다. 어린 딸이 소라를 따오면 어머니는 한 근, 두 근 무게를 달아 딸의 몫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배운 바다는 평생의 일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전복을 찾아낼 만큼 뛰어난 해녀였습니다. 사람들은 요왕 할마님이 전복을 내어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서른한 살에는 물질해서 번 돈으로 집도 지었습니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바다에 들어갑니다.
“물에는 안 무서워요. 바닷속은 안 무섭거든요.”
그에게 바다는 삶을 견디게 한 힘이었습니다.
김순자 삼춘은 고내리 노인회장입니다. 처음에는 부탁을 받고 시작한 총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맡은 일을 하나씩 해내다 보니 어느새 12년째 노인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의 하루는 경로당 문을 여는 일로 시작됩니다.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뒤, 어르신들이 와서 밥을 먹고 하루를 보낼 준비를 합니다.
가장 마음 아픈 일은 오랜 이웃을 하나둘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합니다.
“경로당에 오셔서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고내리를 지켜온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밭을 일군 손, 바다를 향한 숨, 이웃을 돌본 마음, 매일 함께 나눈 밥 한 끼였습니다.
다섯 삼춘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됩니다. 한 사람의 삶이 쌓여 한 마을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