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7월 비정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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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곽효정
시간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제주 삼춘들을 찾아나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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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두 번 제주 마을을 다니며 삼춘들 인터뷰를 합니다. 라디오 구성 작가로도 일하는데, 개편 후 생긴 새 코너가 바로 삼춘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구성하는 거였죠. 처음에는 못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못 하는 이유는 넘쳐나는데요. 특히 삼춘들 인터뷰는 고난이도의 업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때는 어르신의 삶이 역사이며, 소중한 기록이라 생각하여 쫓아다녔던 한경면 시절이 있었어요. 그곳에 살면서 호기롭게 한 대부분의 인터뷰가 생각과는 달랐고, 제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는 어르신은 거의 없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에너지가 고갈된 게임 캐릭터가 된 듯했죠. 어쩌면 그 이유는 어르신들의 답변이 문제가 아니라 제 깊이와 능력치가 모자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쓴 어르신들 인터뷰는 언제나 좋았거든요. 내가 문제이기 때문에 이 코너를 진행할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래도 의무적이지만 정기적으로 인터뷰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었기에 한다고 했습니다.
고민하다 생각난 지원군이 사름 매거진 11호의 인터뷰이 고명효 해녀였어요. 그는 이호마을 해녀로, 해녀의 딸이고 손녀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해녀가 되는 걸 반대했죠. 하지만 해녀 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해녀가 되기로 합니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그는 해녀가 되었고, 물질하러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커야 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는 ‘생애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명효 씨의 해녀복과 도구들을 어머니가 살뜰히 손질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모녀가 서로의 해녀복 입는 일을 도와주곤 했죠. 볕 좋은 날에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바다로, 함께 들어가며 수많은 추억을 쌓게 되었죠.
명효 씨가 들려준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도 덩달아 눈물이 핑 돌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윗세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길 좋아하는 명효 씨라면 삼춘들 섭외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여 연락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암묵적인 동맹이 시작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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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명효 씨가 나고 자란 이호마을에서:
명효 씨는 인터뷰를 따라 나서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마을은 명효 씨가 나고 자란 이호마을인데요. 그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어르신들의 집을 돌며 “삼춘, 몇 월 며칠에 라디오 인터뷰하니까 작가님이랑 갈게요”라고 이야기해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주 어르신과의 약속은 또 모를 일, 명효 씨는 그날 그 시간에 삼춘들이 집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죠. 그렇게 자박자박 걸어가 처음 만난 삼춘이 지난번 소개한 어부 고영길 삼춘이에요. 그리고 다음 집은 명효 씨의 친척분인데, 늘 텃밭에 있곤 하시던 삼춘이 그날따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집 앞을 기웃거리다 마침 농협으로 향하는 앞집 해녀 삼춘을 만났죠. 우리는 삼춘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인터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렇게 두 분의 인터뷰를 마쳤더니, 맞은편에 사는 명효 씨 친척 분 중 한 분인 할아버지께서 나타나셨어요.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보청기를 껴야 했는데, 할아버지 삼춘은 보청기를 끼고서 옛 시절, 무려 일제강점기와 6.25 참전 이야기까지 들려주셨어요.
세상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당시를 살았던 분의 육성으로 듣게 될 줄이야. 인터뷰 때마다 질문의 말미에는 “그 힘겨운 시절을 지나오셨는데요, 그래도 삶에서 행복했다 싶은 순간은 언제였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마다 답변은 달랐지만, 행복이라는 생소한 단어 앞에서 멈칫하는 어르신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세기 남짓한 세월을 살아온 분의 이야기를 내가 잘 담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란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귀한 것이로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삼춘들 인터뷰를 하는 일이 제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가올 시간과 삶 앞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더욱 경청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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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하다와 가슴이 먹먹하다는 말, 문자로만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야
명효 씨와 찾아나선 두 번째 마을은 도두, 세 번째 마을은 호근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마을은 얼마 전에 다녀온 표선면의 세화1리였어요. 섭외는 인플래닝에서 만드는 <퐁낭그늘>이라는 책자를 통해 인터뷰해온 마을 이장님들이 도와주셨어요. (정말 알고 있는 제주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삼춘들을 섭외하고 있어요. 어떤 날에는 무작정 노인회관에 들어가서 노인회장님을 찾기도 했고요.) 세화1리는 당시 표선면 전체에서 여성 이장님이셨던 고태숙 이장님이 도와주셨어요. 아침 9시부터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어르신을 한 분씩 모셔와 주기로 하셨어요. 그런데 약속 당일, 명효 씨가 운영하는 공장에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된 거예요. 늦게라도 온다고 했지만, 부담될까봐 무리해서 오지 않아도 된다고 답한 후 첫 번째 삼춘 인터뷰를 했습니다.
유난히 잊히지 않는 인터뷰였어요. 만근 삼춘이었는데, 곧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기억력이 좋았습니다. 해병대를 나왔는데, 입대 연도와 날짜 그리고 훈련이 끝나는 날짜까지 죄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대 후 세화1리 고향으로 돌아온 삼춘은 좋은 기억력을 바탕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셨죠. 총명함이 남다른 삼춘은 동네 지주들의 심부름으로 토지 매매 계약서를 외워서 써드리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토지 매매 계약을 성사시킨 후, 남아 있는 삼춘에게 동네 지주들이 “자네도 땅을 사보지 않겠나”라고 권유했다고 해요. 가난해서 다른 사람의 밭일을 해주고 살았던 삼춘은 “무슨 돈으로 제가 땅을 삽니까”라고 했더니, 지주들은 자신들이 돈을 대주겠다고 했죠. 그렇게 해서 삼춘도 땅 주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죠. 빚이 빚을 부르는, 4부 이자로 연 40%라는 것을요. 그들은 청년을 두고 돈놀이를 했던 거죠.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터져 나온 삼춘의 깊은 한숨, 그리고 떨어지지 않은 고인 눈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빚을 갚기 위해, 내 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청년은 아버지가 되고 서서히 노인이 되어 지금 제 앞에서 당신의 삶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세화1리 이장님이 모셔온 다른 삼춘이 등장하셔서 삼춘과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려던 찰나, 삼춘이 그랬습니다. 이제 막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는데, 벌써 끝맺느냐고요. 그래서 약속드렸죠.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그리고 두 분의 삼춘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명효 씨가 도착했습니다. 무려 1시간을 내달려서 말이죠. 그때 직감했죠. 이 친구, 진짜 좋아서 함께 가주는 거구나!
인터뷰가 다 끝난 뒤에 도착한 명효 씨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리사무소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만근 삼춘께 다시 갔습니다. 삼춘의 못 다한 이야기를 지금 들을 수 있냐고 여쭤봤더니 삼춘은 다시금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낸 친구들과 선후배가 세상을 떠났으며, 그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고 하셨죠.
가슴이 먹먹하다는 말. 문자로만 존재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9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말이었을까요.
그날은 인터뷰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삼춘 댁을 직접 찾아가서 삼춘이 써온 붓글씨도 죄다 구경했습니다. 몰랐는데, 명효 씨가 붓글씨에도 욕심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기어이 삼춘 댁을 따라가서 삼춘이 키우는 강아지도 만나고, 붓글씨도 다 꺼내서 구경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날마다 노력하며 명필가가 된 삼춘은 얼마나 열심히 살아오신 걸까요? “아내가 집에 있으면 뭐 좀 내올 텐데…”라고 말씀하셔서 잠시 나가셨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요양원에 계시다고 하십니다. 그 후로 잠시 침묵. 삼춘께 인사를 드리고 가려는 우리에게 삼춘은 천천히 말씀하셨죠. “이렇게 누군가 가는 일은 늘 섭섭하다”고요. 처음 본 어르신의 한 마디였지만, 그 말이 왜 제 가슴을 먹먹하게 했을까요? 혼자 남겨진 삼춘의 모습이 저희 아버지 같고, 저희 어머니 같았습니다.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꼭 들르겠다며 삼춘네 집 주소를 저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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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의 봄과 여름 사이
다음 행선지는 비양도입니다. 명효 씨의 해녀학교 동기이자 비양도의 열혈 사무장 친구분이 비양도 삼춘들을 섭외해주었죠. 15분 동안 천년호를 타고 도착한 비양도. 사무장님은 도착하자마자 해녀 삼춘들이 즐겨 타는 보조바퀴가 달린 이동수단(이걸 뭐라고 부를까요? 오토바이와 세 발 자전거의 중간 정도)을 타고서 부탁받은 물건을 건네주느라 바쁩니다. 역시 같은 종류의 이동수단을 탄 삼춘과 인사를 하고는 제 갈 길로 가는 사무장님의 뒷모습이 어쩐지 <폭삭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비양도는 큰 세트장처럼 여겨졌습니다.
길가에 핀 백합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죠. 봄을 지나 여름이 오는 길목의 비양도 마을. 사무장님이 안내해준 첫 번째 집은 해녀 삼춘의 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집은 94세 해녀 삼춘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마지막 집은 천년호를 만드신 삼춘의 집이었고요.
사무장님은 우리를 안내해주었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갓 결혼한 젊은 친구였는데, 비양도에서 나고 자라서 마을을 애지중지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신혼집이 비양도 밖인데도, 날마다 바다를 건너 비양도로 출근하는 거겠죠.
그는 인터뷰 때마다 잠자코 있거나, 피곤한지 한켠에 누워 있더니, 인터뷰 도중 갑자기 눈물을 훔쳤습니다. 인터뷰어인 저는 자주 삼춘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라, 또 녹음 파일에는 잡음이 들어가면 안 돼서 최대한 리액션과 답변을 절제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의 할머니, 할아버지, 어르신의 이야기는 다르겠죠. 이호마을에서 명효 씨가 그랬듯, 비양도에서는 그곳 사무장님이 동요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명효 씨가 말합니다. “우린 늘 삼춘들 만나도 그런 이야기 들을 수가 없어요. 잘 묻지도 않고, 또 삼춘들도 잘 얘기하지도 않아요.” 그래서겠죠? 명효 씨가 자기 마을 어르신들 이야기 말고도, 제주 곳곳의 어르신들 이야기를 직접 들으려고 번번이 저와 함께 인터뷰에 동행해주는 이유가. 오가는 배에서 내내 마을 걱정과 마을 생각뿐인 젊은 사무장님과, 어머니와의 추억 그리고 해녀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해녀가 된 명효 씨가 있어서, 다음 비양도 인터뷰도 든든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봅니다. 여전히 철없고, 고된 일이 싫은 나는, 어쩌자고 이토록 깊고 오래된 생들을 만나고 있는지를요. 그분들을 인터뷰하고 이야기를 기록하는 동안,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라도 제가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도, 주변의 귀 기울이지 못한 어르신들 이야기에 한 번쯤 귀 기울여 보기를 권해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가 살아가는 시간도 조심스러워집니다.
얼마나 무심히 흘러가는지요, 이 생이라는 것이. 그래서 시간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조금 천천히 지나가게 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삼춘들 인터뷰를 한 뒤로는요. 아주 조금씩, 시간과 일과 사람을 대하는 제 태도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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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에서 오디를 따 먹고
시커멓게 물든 삼춘의 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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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오는 풍경을 구경하려고
🚢 천년호가 들어올 때마다
멍멍 짖으며 달려가는 비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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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삼춘들이 전복 따다 옷 사입힌다는 비양도 강아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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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에서 뱀 잡고 유유히 걸어가는
야옹이의 위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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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름 뉴스레터는 지역에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한 이야기를 천천히 전합니다.폭삭 속았을(?) 여러분의 일상에 작은 위로와 용기가 전해지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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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다른 인터뷰이, 또 다른 사름 에디터의 시선으로 담은 지금의 제주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매거진 사름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우 하고 로컬 인터뷰 소식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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