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름+, 열 다섯 번째 이야기
: 한여름 끝에서, 다시 제주를 배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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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끝에서, 다시 제주를 배웁니다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여름을 닫아야 할 때가 왔지만, 아직은 쉽게 보내고 싶지 않은 계절입니다. 뜨거웠던 낮과 습한 바람, 갑자기 쏟아지던 비와 그 뒤에 짙어지는 숲의 냄새까지. 여름의 끝에는 늘 조금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주에 살면서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익숙한 곳도 다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자주 지나친 동네에도 처음 만난 가게가 있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 숲에도 누군가 오래 가꿔온 시간이 있습니다. 한 끼의 밥상, 작은 책방, 시장 한쪽의 간식, 손으로 만든 물건들 사이에서 제주를 다시 배우게 됩니다.
이번 뉴스레터에는 그런 하루를 담았습니다. 8월의 끝에서 짧게 다녀온 서귀포의 길,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 공간의 이야기입니다. 여름을 보내며, 우리가 제주에서 다시 배운 소중한 것들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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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름+ 열 다섯 번째 이야기 순서
- 제주도민의 작은 여행: 한 끼에서 시작된 서귀포의 하루
- 우리동네 로컬 브랜드 : 솜양책방
- 주민이 가꾸다 : 서귀포치유의숲
- 우리 몬딱 소중해: 호근마을에서 만난 두 삼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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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도민의 작은 여행:
세계의가정식 → 카페 파우자 → 치유의숲 → 솜양책방 → 불로초장터 → 사이의시간
이날의 시작은 ‘세계의가정식’이었습니다. 예전 뉴스레터에도 소개했던 좋아하는 음식점인데, 집에서는 멀어 매주 바뀌는 메뉴만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메뉴가 스페인 가정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산티아고 길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떠올라 친구를 불러 서귀포로 향했습니다.
점심 뒤에는 카페 ‘파우자’에 들렀습니다. 파우자는 이탈리아어로 쉼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서 귤꽃 향이 나는 커피를 마셨고, 주인장이 직접 블렌딩했다는 귤꽃 향 와인과 맥주도 하나씩 골랐습니다.
그다음은 서귀포치유의숲이었습니다. 비가 지난 뒤라 숲내음은 더 짙었고, 주민들이 꼼꼼히 안내해준 길을 따라 무장애길을 1시간 반쯤 걸었습니다. 그동안 걸었던 제주 숲길 가운데 손에 꼽을 만큼 좋았습니다.
숲을 나와서는 솜양책방으로 향했습니다. 책과 문구, 제주가 그려진 엽서들이 놓인 작은 책방이었습니다. 이곳 이야기는 아래에서 조금 더 자세히 전하겠습니다.
중간에 허기가 져 올레시장 불로초장터에도 들렀습니다. 떡볶이와 튀김, 처음 먹어보는 고기튀김을 사서 시장 한쪽에 앉아 먹었습니다. 제주도민인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 코스는 올레시장 안 소품가게 ‘사이의시간’이었습니다. 직접 구운 그릇과 작은 소품들이 모여 있는, 이름처럼 잠시 머물기 좋은 가게였습니다. 이곳 이야기도 언젠가 따로 소개해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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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동네 로컬 브랜드
: @somyang.bookst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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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햇살이 머무는 작은 책방 솜양책방 권시현 대표
솜양책방은 서귀포의 한 동네에 자리한 작은 책방입니다. 책과 문구, 제주가 그려진 엽서들이 가지런히 놓인 공간. 오후 햇살이 책장 사이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한쪽에는 주인장이 직접 고른 책들이 표지를 드러낸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권시현 대표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제주가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댁이 서귀포에 있어 방학이면 제주에 오곤 했고, 그에게 제주는 “낯선 여행지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일에 치여 지내던 시기, 그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제주에 왔습니다.
책방을 열기 전에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책방과 소품샵을 찾아다녔고, 언젠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문구를 모아둔 작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제주에 온 뒤 제주더큰내일센터에서 창업 교육을 받으며 막연했던 꿈을 조금씩 구체화했고, 그렇게 지금의 솜양책방이 문을 열었습니다.
‘솜양책방’이라는 이름은 대표가 직접 만든 양 캐릭터 ‘솜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양 캐릭터를 좋아했고, 언젠가 자신만의 양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양을 떠올리면 느껴지는 평화롭고 포근한 이미지처럼, 책방 역시 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이 되었으면 했어요.”
그 마음은 책방 안에도 놓여 있습니다. 대표가 특히 공들인 자리는 엽서를 위한 책장과 전면 책장입니다. 엽서 크기를 직접 재고, 책의 표지와 제목이 한눈에 보이도록 크기와 색상을 정해 책장을 제작했습니다. 솜양책방의 책장 대부분은 그렇게 공간에 맞춰 직접 만든 가구입니다.
솜양책방에는 소설과 에세이, 어린이·청소년 도서, 독립출판물, 작은 문구들이 놓여 있습니다. 대표는 단순히 잘 팔리는 책보다, 이 책이 솜양책방이라는 공간과 잘 어울리는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나 새로운 생각의 시간을 건넬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독립서점은 운영하는 사람의 취향과 시선이 공간 곳곳에 자연스럽게 담기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시현 대표는 솜양책방이 누군가에게 하루를 천천히 정리하는 공간, 새로운 책과 취향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혼자 찾아와도 편안하고, 여행 중 잠시 쉬어가도 좋고, 동네에서 가볍게 책 한 권을 골라도 좋은 곳. 솜양책방은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진 작은 휴식 같은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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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을주민이 가꾸다
: 서귀포치유의숲
숲을 걷는 일은, 마을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서귀포치유의숲은 호근동 시오름 일대에 자리한 숲입니다. 해발 320~760m에 난대림, 온대림, 한대림이 고루 분포하고, 평균 수령 60년 이상의 편백 숲이 여러 곳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숲길을 걷기 위해 찾아간 곳이지만, 알고 보면 이 숲은 호근마을 사람들의 손과 깊이 이어져 있습니다.
치유의숲에서 음식물 반입은 제한되지만, 예외처럼 만날 수 있는 밥상이 있습니다. 바로 호근마을 주민들이 만드는 차롱치유밥상입니다. 제주에서 음식을 담아 나르던 대나무 바구니 ‘차롱’에 톳주먹밥, 빙떡, 고사리전 같은 제주 음식을 담아내는 밥상입니다. 숲에서 먹는 한 끼이지만, 그 안에는 호근마을의 재료와 손맛, 오래된 생활문화가 함께 담깁니다.
호근마을은 2016년 서귀포치유의숲 조성 이후 차롱치유밥상을 운영하며 생태관광마을로 이름을 알려왔고, 2019년 제주생물권보전지역 생태관광마을에 이어 2024년 환경부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마을공동체가 운영하는 차롱밥상, 구덕장의 차롱 전수와 체험, 주민들이 가꾼 미로의 숲과 하논분화구 습지, 치유의숲과 시오름이 함께 생태관광 자원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서귀포치유의숲을 걷는 일은 단순히 숲길을 걷는 일이 아닙니다. 숲을 안내하는 주민, 숲을 찾은 사람에게 밥상을 내어주는 주민, 오래된 차롱과 구덕을 다시 쓰이게 하는 장인의 손을 함께 만나는 일입니다.
이번에 숲을 걷고 나니, 지난해 봄 호근마을에서 만난 두 사람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마을회장 현상봉 삼춘과 구덕 장인 오영희 장인입니다. 한 사람은 차롱도시락이 마을의 이름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들려주었고, 한 사람은 그 차롱을 손으로 엮어온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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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 몬딱 소중해
: 호근마을에서 만난 두 삼춘
숲을 해설하는 사람, 차롱을 엮어온 사람
서귀포치유의숲을 걷고 나오며 지난해 봄 호근마을에서 만난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한 사람은 전 마을회장 오종석 삼춘이고, 또 한 사람은 구덕 장인 오영희 장인입니다. 한 사람은 숲을 찾은 사람들에게 호근마을을 소개하고, 한 사람은 열네 살부터 대나무를 엮어 구덕과 차롱을 만들어온 사람입니다.
오종석 삼춘은 1955년 호근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아왔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마을 어르신들을 따라 마을 일을 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는 청년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때 그는 제주를 찾을 외국인들을 생각하며 마을 청년들과 함께 영어와 일본어 강좌를 열었습니다. 관광농원 직원들과 마을 사람들도 함께했습니다. 마을의 앞날을 조금 먼저 내다본 일이었습니다.
호근마을은 바닷가부터 산까지 이어진 마을입니다. 바닷가에는 속골이 있고, 산자락에는 서귀포치유의숲이 있습니다. 오종석 삼춘은 지금도 그 숲에서 일주일에 닷새, 숲 해설사로 일합니다. 찾아온 사람들에게 숲을 설명하고, 호근마을을 자랑하는 일이 즐겁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작은 꿈도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영어로 치유의숲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영어 회화 수업에도 빠지지 않고, 영어로 적어둔 숲 해설 원고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언제 외국인을 만나더라도 서툴지만 천천히, 호근마을과 치유의숲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오영희 장인의 이야기는 손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열네 살 때부터 구덕을 만들었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집에는 월사금과 입학금을 낼 돈이 없었고, 결국 형님들이 하던 일을 어깨너머로 보며 구덕 짜는 법을 익혔습니다.
구덕은 제주 사람들이 나물이나 생선, 곡식을 담아 나르던 전통 바구니입니다. 대나무를 베고, 쪼개고, 삶고, 말리고, 결을 따라 엮어야 비로소 하나의 그릇이 됩니다. 오영희 장인은 보릿고개 시절 이 구덕을 만들어 곡물과 바꾸며 살았습니다.
“나 손으로 일한 걸로 번 거야, 이 땅.”
세월이 지나 플라스틱 물건이 나오면서 구덕을 찾는 사람은 줄었습니다. 하지만 손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구덕과 차롱을 찾는 사람들이 생기고, 배우려는 사람들도 찾아오면서 장인은 지금도 대나무를 만지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가면 일거리가 없다고 그러는데, 나는 일거리가 많이 생겨 가지고 그게 남들보다 더 뿌듯한 것 같아.”
서귀포치유의숲을 걷고 나면, 숲만 남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 해설 원고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오종석 삼춘의 마음과, 대나무를 엮어온 오영희 장인의 손이 함께 떠오릅니다. 숲을 찾은 사람에게 건네지는 한 끼와 한마디 안에는 호근마을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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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대나무를 손질하며 구덕을 엮는 오영희 삼춘. 열네 살부터 이어온 손의 기술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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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호근마을 구덕 장인의 손끝에서 완성된 차롱 |
③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 골목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던 오영희 삼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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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8월에는 제주 곳곳의 숲을 조금 더 걸어보려고 했습니다. 제주에 산 지 9년 차에 접어들면서, 어느 순간 이 섬을 일로만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걷고, 다시 보고, 다시 좋아하기 위해 숲 목록을 정리하던 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최근 들려온 좋지 않은 소식들 때문에 숲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잠시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몇 개의 사건만으로도 한 장소 전체가 위험한 곳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저 역시 사랑하던 숲길 앞에서 예전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아직 조심스럽게 지켜봐야 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잘못된 것은 바로잡히고, 필요한 것은 더 세심하게 살펴지기를 바랍니다. 제주의 숲과 길이 불안의 이름으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마음 놓고 숲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8월의 끝에서, 다음 계절의 제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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