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처럼 앉아,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침
7월의 어느 아침, 조천리 바다 앞마당에 세 삼춘이 앉아 있었습니다. 매주 하는 바다 청소를 마친 뒤였습니다. 김순희 삼춘의 집 마당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눈앞으로는 바다가 보였습니다. 일하러 모인 자리였는데, 멀리서 보면 꼭 소풍 나온 사람들 같았습니다.
저는 그 곁에 앉아 세 삼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제주로 돌아온 어린 시절, 4.3으로 아버지를 잃은 기억,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밭으로 가야 했던 날들. 서로 다른 삶이었지만, 이야기는 어느새 조천리라는 한 마을의 시간으로 이어졌습니다.
고창순 삼춘은 행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무렵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대마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배가 뜨지 않으면 또 하루를 기다리며 제주로 왔다고 했습니다. 돌아온 제주는 넉넉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고, 나무를 해다 불을 때고, 보리밥과 된장국으로 끼니를 이었습니다.
“고생만 고생만 했지.”
어린 시절에는 땅따먹기를 하고, 깨진 사발 조각으로 소꿉놀이를 했습니다. 더운 날이면 바다에서 헤엄치며 놀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자라서는 밭일과 바닷일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 뒤에는 남편의 어부 일을 도우며 그물을 걷고, 배를 씻기고, 바다에 나갔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때를 묻자 고창순 삼춘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아기들하고 재미나게 사는 것밖에.”
아이들이 오말조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시간. 식구끼리 음식을 나누던 시간. 삼춘이 말한 행복은 매일의 밥상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김순희 삼춘은 구좌읍 행원 출신으로, 결혼 뒤 조천리에 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해녀 일을 시키지 않고 공부시키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4.3이 일어나고, 아버지는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순희 삼춘은 아침저녁으로 아버지 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을 들고 가던 길에 아버지가 붙잡혀 나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밥은 어떡하고. 아버지는 이제 밥도 못 드시고.”
그때 순희 삼춘은 열세 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고, 그는 이후 물질을 시작했습니다. 열다섯 무렵부터 바다에 들어갔고, 강원도 최전방까지 물질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땅을 사고, 바다 가까운 곳에 집을 지었습니다. 물에 가기 쉽도록 담을 트고 문도 냈습니다. 그 문은 삼춘에게 바다로 나가던 삶의 출입구였습니다.
지금은 해녀 일을 그만두었지만 순희 삼춘은 여전히 매일 마당의 풀을 뽑습니다. 넓은 잔디를 손으로 가꾸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집과 바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날도 우리에게 차가운 우뭇가사리를 내어주었습니다. 바다에서 뜯어 말리고, 삶아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을생 삼춘은 신촌에서 태어나 21살에 조천으로 시집왔습니다. 7남매의 맏딸이었던 그는 어릴 때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마음껏 다니지 못했습니다. 책가방을 들고 나가도 밭으로 불려가야 했고,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결혼 뒤에도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집도, 밭도 넉넉하지 않아 남의 밭과 과수원을 빌려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도 집을 마련하고, 네 남매를 키워 결혼시키고 나니 그것이 큰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고생은 이제 잊으려고 한다고도 했습니다.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말처럼 현을생 삼춘은 지금도 생기 있었습니다. 장구를 배우러 다니고, 공연도 하고, 요즘은 파크골프도 친다고 했습니다. “내 자유로 놀러 다닐 때가 제일 행복했다”는 말에서는 오래 일한 사람이 뒤늦게 자기 시간을 되찾은 기쁨이 느껴졌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삼춘들은 우뭇가사리를 더 먹으라 하고, 상추와 콩잎도 챙겨주려 했습니다. 바다는 바로 앞에 있었고, 마당에는 햇빛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웃고,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이 천천히 흘렀습니다.
그날 조천리에서 들은 것은 밭과 바다를 오가며 살아온 몸의 기억이었습니다. 가족을 잃고도 살아낸 시간, 아이들을 키우고 다시 자기 삶을 찾아가는 마음이었습니다. 세 삼춘은 조천리 바다 앞에 소풍처럼 앉아 있었지만, 그 자리에 놓인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곁에 잠시 앉아, 한 마을이 어떻게 사람의 삶으로 남는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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