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름+, 아홉 번째 이야기
: 잊고 있었는데 자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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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봄, 지인으로부터 작은 화분을 선물받았습니다. 예전에 선인장마저 죽인 적이 있어서 한동안 식물을 들이지 않았는데, 선물로 받은 이상 이번에는 죽이지는 말자는 마음이었죠. 지인은 혹시 키우기 어려울까 봐 꽃집 사장님께 가장 쉽게 자라는 화분으로 달라고 했다며, 잊을 만할 때 물을 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잊고 지냈습니다. 집에 식물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한 달 가까이 물을 주지 않은 날도 있었죠. 싱크대 옆에 두었다가, 책상 앞으로 옮겼다가, 작업실 창가와 피아노 위를 거치고, 결국 고양이가 엎질러 베란다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무심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키가 두 배쯤 자라 있는 걸 보고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생명은 자기 힘으로 자라고 있었구나 싶어서요. 그 후로는 화분갈이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2년째,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작년 생일에는 동백나무를 선물받았습니다. 물을 줄 때마다 겨울이면 꽃이 피겠지 기대했지만, 겨울이 다 가도록 봉우리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월의 어느 날, 아주 천천히 꽃잎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3월을 하루 앞둔 오늘 드디어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작은 식물 하나가 자라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건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여러분의 2월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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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름+ 여덟 번째 이야기 순서
- 제주에서 이렇게 일합니다 : 코리아커피위크 이태영
- 우리 몬딱 소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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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동네 로컬 브랜드
: 단단한 진심으로 다가가는 카페 단단_방승주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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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태풍이 몰려오던 2019년 10월, 주인 모를 화분이 나란히 놓인 좁은 골목에 ‘카페단단’이 문을 열었다. 한여름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동네에 떡을 돌린 날에도 태풍이 닥쳤다. 우산이 뒤집히고 옷이 젖어도 동네 사람들은 첫날의 카페를 찾아왔다. 태풍을 뚫고 온 손님들처럼, 그들의 응원 역시 단단했다. 그 응원을 받으며 방승주 사장님은 가게를 운영해왔고, 최근 내부 공간을 터 확장을 마쳤다.
단단은 한때 “좋은데 작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했다. “단단을 시작할 때부터 안고 있던 숙제가 ‘카페가 작다’였어요.” 업력이 쌓일수록 용기보다 겁이 먼저 자랐다고도 했다. 넓혀놓고 텅 비면 어쩌지 하는 자영업자의 걱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어느 순간부터 손님께 사과만 하고 있더라고요. 자리가 없어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 죄송합니다.” 오늘까지 단단을 찾아준 사람들이 조금 더 편히 머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장의 출발점이 됐다.
공간은 넓어졌지만,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원래 단단같다.” 확장된 카페가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단단으로 남고 싶었다. “손님이 다른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어떤 분이 ‘내 몸 하나 편히 맡길 수 있는 카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참 좋았어요.” 넓어졌지만 중심은 여전히 편안함과 균형이다.
최근 그는 영상으로도 말을 건넨다. 7년간 글로 기록해오던 인스타그램이 잠시 멈춘 뒤,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저는 결국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더라고요.” 카페와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손님들이 함께 쌓아온 순간을 다른 방식으로 남기고 싶었다. “마라맛 도파민이 아니면 사장되는 시장에서 순두부 같은 매력일지도 모르죠.” 화려하지 않아도, 꾸준히 쌓이면 된다는 믿음은 변함없다.
올해 목표는 바리스타 직원 한 명을 채용하는 일이다. “이제 작다는 말은 안 듣지만, 닫혀 있었어라는 말은 듣고 있거든요.” 휴일을 줄이고, 코로나 시기에 열었던 중고 플리마켓 ‘관덕로 주차장’도 다시 열 계획이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자로서 더 성장하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제 음성과 언어로 누군가의 열정에 도움이 된다는 건 기쁨 그 자체였어요.”
지금의 단단을 한 문장으로 묻자 그는 또박또박 답했다. “로컬에게는 편안함 속 기분 좋은 전환을, 여행객에게는 설렘 속 따뜻한 편안함을. 제주 원도심 로컬 스페셜티 커피숍, 카페단단.” 태풍을 뚫고 시작된 첫날의 마음 위에 시간이 겹겹이 쌓였다. 공간은 넓어졌지만, 진심은 여전히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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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에서 이렇게 일합니다
: 기획은 구조, 커피는 언어_코리아커피위크 이태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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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은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 커피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해온 사람에 가깝다. 고고미술사를 전공했고, 한때는 큐레이터를 꿈꿨다.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 커피를 만나 자격증을 취득했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장 경험 없이 가르치는 일에 의문이 들어 매장에서 직접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단순히 커피를 추출하는 일보다, 전달 방식에 더 오래 머물렀다. 원두를 포장해 판매하던 일을 맡았을 때 단순 판매에 그치지 않고 프렌치프레스와 함께 세트로 구성하는 방식을 제안했고, 그 경험은 메뉴 구성과 진열, 브랜드 기획으로 이어졌다. 바리스타가 아니어도 커피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해가는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스페셜티 커피 업계의 여러 브랜드와 프로젝트를 경험한 뒤, 2019년 그는 제주에 정착했다. 제주에서 그는 처음으로 ‘어디서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한다. 아이와 함께 살고 싶은 곳, 나중에 그 아이에게도 고향처럼 기억될 수 있는 곳을 고민하다 제주를 택했다. 입도 후에는 스페셜티 전문 카페 ‘커피템플’에서 경영기획 이사로 일하며 브랜드 운영과 브랜딩 전반을 맡았다. 그 시간은 커피를 산업과 구조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 밀도 높은 경험이었다.
코리아커피위크는 그 연장선 위에서 시작됐다. 대형 박람회 안에서는 브랜드의 이야기와 진정성이 소비자에게 충분히 닿기 어렵다는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주제가 있는 전시를 직접 기획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겼고, 그 바람이 코리아커피위크로 이어졌다. 처음엔 서울 개최도 고민했지만, 함께 성장하는 구조와 공공성이 담긴 기획을 펼치기에는 제주가 더 적합하다고 느꼈다. 상주 인구 대비 카페 수가 많은 제주, 그러나 대부분이 1~2인 규모로 운영되는 구조 속에서 그는 건강한 커뮤니티의 필요성을 보았다. 연결을 만드는 일, 그것이 코리아커피위크의 출발이었다.
첫해 방문객 1,300명 중 90퍼센트가 도민이었고, 그중 80퍼센트 이상이 커피 비종사자였다. 그는 스페셜티 커피를 어렵지 않게, 다정한 언어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코리아커피위크에는 ‘커피 색은 블루’라는 슬로건이 있다. 커피는 갈색이라는 익숙한 이미지를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보자는 제안이다. 이후 ‘커피는 물보다 진하다’, ‘제주 블루스’로 이어지며 하나의 테마 안에서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는 전시를 만들어왔다. 부스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브랜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블루를 해석하도록 설계했다. 그는 기획을 “잘 바라보고, 그 가치를 더 잘 전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참가 브랜드 선정 기준 역시 진정성에 두었다. 생산자 이력이 분명하고, 전 과정에 이야기가 담긴 브랜드, 고유한 철학이 느껴지는 곳. 회차가 쌓이며 참가사는 늘었다가 다시 줄었다. 44개까지 확대했다가 20개로 한정하며 긴밀함을 택했다. 기존 참가사와 신규 참가사 비율을 조정하며 공정성과 다양성의 균형도 고민했다. 숫자보다 관계를, 규모보다 방향을 먼저 두는 선택이었다.
현재 그는 제주소통협력센터 1층에서 ‘코스모스 커피 컴퍼니’를 운영한다. 코리아커피위크의 철학을 일상으로 옮긴 공간이다. 월간커피를 통해 도내외 로스터리의 커피를 소개하고,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퍼블릭 커핑을 연다. ‘ㅋㅋㅋ’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 모임은 어느덧 55회를 넘겼다. 소비자와 사업자가 한 공간에서 커피를 나누며 연결되는 자리다.
이태영은 말한다.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매일 계속하는 것이라고. 속도가 느려질 때도 있지만 “나는 계속한다”는 마음으로 걷는 것. 그에게 기획은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그 안의 의미를 발견해 더 명확하게 전달하는 일이다. 커피는 그가 선택한 언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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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 시작된 물질, 하귀에서 이어진 오십 년
해녀 김혜숙 삼춘 이야기
“저는 하귀에서 50년 동안 물질하고 있는 해녀 김혜숙이우다.”
그런데 첫 물질은 하귀가 아니었다. 울릉도였다. 출향 해녀였던 어머니를 따라 방학 때 울릉도로 갔다. 저금통을 털어 5천 원을 들고 동해호를 탔다. 바다를 내려다보니 물이 너무 맑아 바닥이 훤히 보였고, 소라와 전복이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도 할 수 있을 거 닮아.” 제주에서는 소중이도 제대로 입어본 적 없었지만, 울릉도의 깊은 바다에서 처음 숨을 고르고 내려앉는 법을 배웠다. 그게 시작이었다.
울릉도에서 남편을 만났다. 오징어 배를 타고 온 사람이었다. 인연이 이어져 하귀2리로 시집을 왔다. 처음 하귀 바다에 들어갔을 때 놀랐다. 울릉도는 조류가 세서 보이는데도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하귀는 한 번 숨을 들이쉬면 “쑥쑥쑥” 내려갔다. 그렇게 하귀 바다에서만 오십 년이 흘렀다.
결혼하면 물질을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남편은 젊은 나이에 집안을 책임진 장남이었고,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다. 600평 밭과 작은 집 한 채. 다른 일을 찾기 어려웠던 삼춘에게 다시 남은 건 바다였다. 물질은 힘들었지만 시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다. 아이가 아프면 그날은 들어가지 않고, 몸이 안 좋으면 쉬어갈 수 있었다. “아기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 물질이 최고.”
가장 또렷한 기억을 묻자, 그는 첫 아이를 안던 날을 말했다. 남들은 좋았다고 하지만, 그는 울었다. “우리 엄마도 날 이렇게 낳았겠구나.” 말대꾸하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고 했다. 아들을 장가보내던 날에도 울었다. 젖을 달라 매달리던 아이가 어느새 자기 살림을 차리겠다고 나서는 순간, 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물이 먼저 나왔다.
울릉도에서 시작된 숨은 하귀 바다에서 오십 년을 이어왔다. 삼춘의 삶은 거창한 사건보다 매일의 선택으로 쌓였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아이를 키우고, 다시 바다로 나가는 시간들. 그는 말한다. 그냥 살아온 게 아니라, 버텨내며 살아왔다고.
editor in chief. 곽효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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